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효용성(Utility)을 인정하자.

‘시프트 + 딜리트, 엔터’ 다음 키를 윈도우 컴퓨터에서 순서대로 누르면 데이터는 0.5초 안에 사라진다. 마치 유리판에 알코올을 부어놓고 입김으로 후-하고 기화시킨 것과 같다. 정보는 순식간에 휘발된다. 기록하는 방식과 그 기록을 소멸시키는 방법이 쉬워진 21세기다. 하지만 일부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인터넷의 아버지 빈트 서프는 21세기는 자칫 ‘잊힌 세기’(Forgotten Century)로 마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1세기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급변한 시대이다. 우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극단적인 매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디지털은 다음세대의 매체를 위한 과도기적 포맷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세기의 아날로그 기록과 21세기의 디지털화 과도기(Transition)을 잘 대처해야한다. 인류가 축적한 아날로그/디지털의 문화유산과 콘텐츠, 기록을 잘 보존해야한다. 그래야 빈트 서프 우려한 ‘잊힌 세기’라는 대재앙을 피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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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아카이브의 장점은 물리적 공간의 경제성을 들 수 있다. 디지털아카이브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클라우드 개념의 저장 공간을 통해 접속 가능한 루트를 가지고 있으면 지구 반대편에서 밤낮없이 정보와 콘텐츠에 접근과 열람이 쉽다. 과거 집에서 영화를 시청하기 위해서 비디오(Home Video, VHS)가게에서 카세트를 빌려 시청했다. 비디오장 구석구석에서 보물을 발견하기도 하였으며, 비디오 카세트 커버의 제한된 정보만 보고 비디오를 빌렸다가 낭패를 보기도 하였다. 이제는 영화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졌다.(아카이브가 아닌 라이브어리의 경우.) IPTV나 스마트폰을 통해 영화 리뷰와 평점을 확인하고, 순식간에 다운받아 영화를 시청할 수 있다. 이처럼 물리적 공간과 접근에 따른 시간성이 사라지고 영상콘텐츠의 접근성에 대한 격차를 줄였다. 하지만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디지털의 취약점은 정보의 휘발성이다. 손에 잡히는 실체가 어디에도 없으며, 어디까지나 현실의 재현의 환영일 뿐, 원본으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잊히기 쉬우며, 존재자체가 부정될 수도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서태윤(김상경 분)이 말한다. “서류는 거짓말 안한다니깐요”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모습이 다소 답답해 보이긴 하지만, 그 말에 수긍이 간다. 하지만 디지털의 경우 만질 수도 없고 실체가 없으므로 복제된 것인지, 위조된 것인지 알 길이 없으며 삭제가 쉽고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휘발성으로 인해서 절대적 신뢰가 어렵다.

 

선사시대 인류는 석판, 바위에 글이나 그림 따위를 각석하여 정보를 보존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없다면 고구려의 역사의 존재가 부정될 수 도 있었다. 이처럼 아날로그 기록은 세대 간의 영속성이 명확하다. 디지털의 경우, 정보를 열람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없다면 그 정보는 해독불가의 암호일 뿐이다. 하지만 돌에 각석된 정보는 그 보존상태만 잘 유지된다면 반영구적으로 보존가능하며 역사를 증명할 확실한 증거로 역할 할 수 있다. 정보의 뛰어난 접근성과 세대 간의 영속성이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조간신문을 석판에 각석한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한 달 분량의 일간지 신문이 작은 도서관의 서가를 가득 메울 것이다. 필름이나 양피지에 새겨진 정보는 쉽게 물리적 공간의 포화상태를 맞이한다.

 

모세가 신에게 받은 십계명은 두 개의 석판에 각석됐다. 고구려의 19대왕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각석한 광개토왕릉비 역시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하나는 그 존재를 찾을 수 없고, 다른 하나는 중국 지린성에서 1600년이 넘는 세월을 이겨냈다. 아날로그 역시 그 기록의 영속성은 완전하지 않다. 디지털 기록의 역사는 불과 수 십 년이다. 아날로그는 그 실체가 손에 잡힌다는 강점이 있다. 디지털은 기록과 저장의 경제성이라는 강점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서로를 극단적인 매체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 ‘소니’사의 바이오(VAIO) 노트북 컴퓨터의 로고를 보면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변화과정을 잘 보여준다. VA 라고 쓰인 로고의 일부분은 오실로스코프에 그려진 아날로그 파형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이어지는 IO는 디지털의 이진법 0과 1을 의미한다. 이 로고는 현실의 아날로그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삶과 디지털 가상세계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함축하였다. 이 자연스러운 이어짐(Transition)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코 개별의 매체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21세기는 매체가 변화하는 과도기일 뿐이다. 우리는 두 매체의 효용성(Utility)을 인정하며 이 시기를 잘 보내야한다. 어느 한 매체에 너무 의존하면 빈트 서프가 우려한 ‘잊힌 세기’라는 재앙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두 매체의 장점에 대해서 깊이 이해하고,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며, 단점을 경계해야한다. 이를 통해서 위대한 문화유산과 콘텐츠, 기록들을 다음세대를 위하여 온전하게 전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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