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이유 (곡성없는 곡성리뷰)

곡성;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이유. 그리고 곡성 없는 곡성리뷰(스.포.없.음.)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동진이 이전에 별 5개를 준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봅시다. 영화로 뭉친 SNS 앱, 왓차에서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영화를 하나하나 둘러보면…

나홍진, 곡성

왕가위, 화양연화

이마무라 쇼헤이, 나라야마 부시코

기타노 다케시, 소나티네

고에다 히로카즈, 원더풀 라이프

알폰소 쿠아론, 그레비티

홍상수, 옥희의 영화

미셀 공드리, 이터널 선샤인

 

위 영화리스트는 이동진 평론가가 별 5개를 준 영화입니다. 저 역시 별점 4개 ~ 5개를 준 영화이며, 재미있게 본 영화입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본 수백편의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동진이 높이 평가한 영화리스트들은 스스로 학습한 결과, 객관화된 준거에 의해 평가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영화와 제가 좋아하는 영화 사이에 묘한 선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을 반영한 공감의 선입니다. 물론 그 선은 이동진과 대중을 연결해주는 선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러한 형용할 수 없는 이끌림에 끌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줍니다.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영화를 보면, 이 영화들은 시대를 초월해 어느 시점에 영화를 봤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영화를 본 사람들 사이에 공감의 선을 이어준다는 것입니다. 곡성은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시대를 초월한 사람들 사이의 연결을 확인할 수 없어 과거의 작품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입니다. 영화는 이마무라 쇼헤이의 역작입니다. 잘 알려져 있는 ‘고려장’ 전래동화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영상자료원에서 16미리 필름으로 봤습니다. 디지털 상영이 당연한 시기에 필름 스크레치와 노이즈가 가득한 필름을 시청한 이유는 향수가 아닙니다. 시대를 초월한 연결고리를 느끼기 위함이었습니다. 옛날 어느 필름 상영관에서 상영되었던 그 프린트를 통해 당시의 공감선을 이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나라마야 부시코는 블루레이 풀HD 버전이 있습니다. 어떠한 판형이던지 영화 속 원시적 욕망을 세대를 초월해, 공감하기 위함이라고 과대 포장할 수 있겠지요.

이처럼 영화는 끝나도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평론가 정성일씨는 영화를 보는 세가지 시간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보러가는 시간, 영화 속에서 영화를 보는 시간, 영화가 끝나고 영화를 비평하는 시간, 세 가지 시간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영화가 영속성을 가지게 합니다.

정성일씨가 말한, 영화를 실질적으로 보는 물리적인 시간이 끝났지만, 우리 머리 속과 주변인들 사이에서 영화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셉션 속 팽이가 아직까지 돌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도 같습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영화의 세 번째 시간에서 사회적 담론이 될 것. 영화 곡성은 끝났지만 곡성 속 주민들처럼 우리는 혼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이처럼 이동진 평론가 별점 5개의 영화에는 몇 가지 규칙이 존재합니다.

 

먼저,

1. 영화를 보는 시간 이후에도 영화적 영속성을 가질 것.

 

화양연화를 보고 저는 앙코르 와트에 다녀왔습니다. 왠지 그래야만할 것 같아서 다녀왔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아직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왜곡되고 분절된 그녀의 기억을 토악질하듯 반추했습니다. 나라야마 부시코를 보고 난생처음으로 존재하지 않는 내 미래의 자식들을 생각했고, 내 죽음이 아닌 내 부모의 죽음을 직면했습니다. 영화가 가진 세 가지 시간뿐만 아니라 마치 백투더퓨처의 실타래처럼 꼬여버린 시간들을 제 속에서 끄집어내는 신기한 체험을 했습니다.

2.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이 된다. 경이롭다.’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그래비티의 한줄 평 내용입니다. 저는 쓰리디 영화를 안 좋아합니다.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평면스크린으로 봐야한다는 매체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영화 그래비티를 일반 상영관에서 보고, 영화가 끝날 무렵 저는 그래비티(중력)을 체험합니다. 4DX도 아니고, 3D 상영관도 아닌 일반 상영관에서 중력을 느꼈습니다. 그래비티가 헐리웃 흥행공식을 갖췄다는 상업주의적 관점은 집어치우고, 저는 진심 물리적 중력을 느꼈습니다. 르미에르 형제가 영화라는 마술을 대중에게 공개했을 때, 사람들이 기차의 모습을 보고 도망갔건 것처럼 경이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빛과 소리가 나는 평면의 스크린에서 대부분의 영화가 만족시키는 시청각적 관람을 넘어 감정이 아닌 물리적 중력을 느꼈다는 것은 영화가 가진 제5원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3. 포스트 봉준호, 우리 관객의 수준성장

각각의 매체는 시대마다 특정매체를 소비하는 계층이 존재합니다. 비운의 천재 감독 이만희가 영화를 만들던 시절을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로 봐야하나? 임권택, 박찬욱이 칸에 다녀왔을 때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인가? 그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하긴 힘들 것입니다. 한국 영화사의 르네상스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상업적 측면에서 영화가 잘 소비되는 시기는 분명 존재합니다. 박찬욱, 봉준호의 영화를 본 세대가 아닌 그들의 영화를 듣고 자란 세대가 지금 시대의 영화 매체의 소비 계층입니다. 저 역시 박찬욱이 영화를 개봉했을 당시 그 영화의 재미를 크게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굵직한 이름들이 나오는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면 씹어먹을 듯이 영화를 봅니다. 마치 어린시절 명절에 해외유명 외화를 보려고 시계알람을 맞추고 기다렸던 것처럼 말이지요. 지금 영화 곡성을 본 사람들의 세대가 그렇습니다. 곡성 이전에도 곡성과 같은 영화들이 분명 존재했습니다. 완전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든 영화입니다. 하지만 포스트봉준호 이후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영화를 듣고 자란 이들이 영화를 소비할 시기와 곡성의 개봉일이 너무나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자칫 5년 전에 개봉했더라면 이정도 반응이 나왔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시기적절한 관객들의 욕구 만족이 이동진이 별 5개를 준 이유입니다. 물론 저는 3.5개 줍니다. 저는 제가 언급한 세대의 타겟을 벗어나 있거든요.

마지막으로,

이동진씨가 별점 5개를 주는데 있어서 저만의 몇 가지 규칙을 발견했습니다. 일부 영화를 좀 본다는 사람들이 이동진의 평을 보고, 멱따러 간다는 농담들이 있었지요. 이해합니다. 그분들 역시 저와 같이 영화를 소비하는 특정 타겟층에 조금은 벗어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노여워말아요. 영화는 별점 따위로 박제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성일씨가 말했습니다. 영화를 별점으로 평가하는 것은 영화를 박물관에 박제로 만든다는 것이라고 그러더군요. 공감합니다. 별점 2개 줬던 홍상수 감독의 ‘옥희의 영화’를 여자친구 바람나고 나서야 별 5개줬다는 지인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영화를 박제화해선 안되겠습니다. 기승전, 정성일이군요. 영화가 가장 즐거울 때는 영화의 세 번째 시간인 ‘영화를 보고 평론을 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친구와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오던 내내 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나의 평론과 비평으로 친구와 대립하고 있다니, 문화인이 된 것 같았습니다.

반추해보면 제 인생의 시네마 천국이었고, 화양연화였습니다. 영화별점은 대중과 평론가, 나 사이를 삼각형으로 연결해주는 좋은 지표입니다. 맹신하면 편협해지겠지만, 극장 앞에서 고민할 때 좋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가 담론이 되고 화양연화가 된다는 사실이 입고리가 살짝 올라가는 미소를 만드는 밤입니다.

김명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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